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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20-24 예수님을 따르려면 버려야 할 나의 삶과 기준.. 본문에서 예수님은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을 호되게 책망하십니다. 책망의 이유는 그들이 다른곳보다 예수님의 이적을 많이 보았지만 회개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회개란 자신의 잘못된 삶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에 맞게 나의 삶을 방향전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예수님의 이적을 받아들여 회개를 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이적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두로와 시돈은 이방인의 도시로 낙인찍힌 불손한 도시입니다. 또한 소돔은 창세기에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당했던 도시이기 때문에 그만큼의 죄가 있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그런 도시들보다 못한 도시가 바로 고라신 벳세다, 가.. 2021. 2. 3.
마 11:15-19 지혜의 행함은 사랑이다. 제자들에게 의심을 하지 않도록 이야기를 해주고 난 예수님은 이 세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해도 움직이지 않는 이 세대. 요한의 행동을 귀신들렸다하고 예수님의 행동을 비판하고. 이들은 요한과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비판을 하게 됩니다. 그럼 왜 그렇게 자신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동무들을 불러 피리를 불어주고, 슬피 울어줄까? 그것은 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음탕하고, 우상을 섬겨도 하나님의 사랑은 늘 한결같았습니다. 그 사랑의 결정체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자신을 의심하는 요한도, 그 의심의 작은 불씨가 시작되었던 제자들도, 모두가 예수님에게는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 함을 얻느니라”.. 2021. 2. 3.
마 11: 7-14 의심하지 말라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질문을 가지고 몇날 몇일을 걸어서 왔을것입니다. 오는 중에 세례요한의 행했던 일들, 자신들이 왜 제자가 되었는지, 예수는 누구인지 또는 요한은 누구인지, 등등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눋 보면, 부정적인 말의 힘이 크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한 의심이 커져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질문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은 떠나는 요한의 제자들을 아련하게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있는 제자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7) “그가 오리라 한 엘리야이다”(14) 예수님은 잠깐 흔들리는 요한의 마음에 많이 아타까워 하셨습니다... 2021. 2. 3.
마 11:2-6 실족하지 말라 본문에서 요한은 제자들을 시켜 예수께 질문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그의 질문은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주며 “하나님의 어린양 이로다” 라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을 의심하고 다시 확인 받고 싶어 하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촌 형으로 6개월 차이가 납니다. 사실 동갑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한을 같은 사역자로서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요한에게 그 제자들에게 “실족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족하다”라는 말은 헬라어 “스칸달리조”이며 이 말은 ‘올가미’나 ‘함정’을 가르키는 ‘스칸달론’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동사입니다. 우리가 걸어갈때.. 2021.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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