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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역사 지리/성서 지리

이스라엘 해안평야(3) 샤론 평야

by 제이 바이블 2011.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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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 평야

1, 지역적 특성

샤론 평야는 악어강 에서 욥바까지 약 80키로 길이의 해안으로 산지까지의 폭은 약 16키로가 되어 비교적 넓은 지역이다. 이 지역의 특성은 붉은 색의 모래로 인해 물이 잘 빠지지 않아 거대한 습지대를 형성하였던 곳이며, 이사야 선지자는 이곳을 사막같다고 표현하였다( 33:9).

사론의 어원은 숲이 우거진 지역이지만 습지대에 형성된 잡목숲을 의미하는 것이다.

샤론의 수선화 (2:1), 샤론의 들(대상 5:16, 27:29, 65:10) 이 모두가 습지대에 의해 생겨난 말들이다.

현대 시대에 들어와서는 터키가 다스리던 시대에는 기차연료를 위해 나무들이 벌목되었으며 1920년에는 시온주의자들이 이 지역을 구입하여 정착할때도 여전히 늪지대였다. 하지만 그후 유대인들은 이곳의 물을 말려가면서 지금은 가장 비옥한 과수재배 단지로 만들었다.

성경에서 샤론평야는 므낫세 지파에게 분배된 지역으로 역시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다고 나온다( 17:12-13, 1:27-28), 또한 샤론 지역에는 레위인들의 도시가 하나도 없었다.( 21:8-42, 대상 6:54-66), 다윗시대에 점령하고 솔로몬은 이곳을 헤벨의 땅”(왕상 4:10)이라고 불렀다. 이후에는 헤롯이 이곳에 가이사랴 항구를 건설하면서 활발한 도시로 형성이 되었다.

 

2, 중요 지역들

a, 가이사랴

갈멜산에서 약 37 키로 떨어진 해안에 위치, 이곳은 B.C 3세기부터 페니키아 사람들에 의해 스트라토의 탑이라는 요새를 지으면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이후 헤롯은 B.C 22년에 거대한 항구도시 가이사랴을 건설하였으며 그 이름은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한것이다. 헤롯의 이 건축은 인류 최초 인공항구도시라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그 방식은 나무로 통을 만들어서 해저 약 450미터 깊이까지 시멘트를 넣어 방파제를 만들었다.

가이사랴에는 원형극장, 마차 경주장, 목욕탕,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신전등의 건물들이 있었으며, 식수는 갈멜산과 악어강에서 조달하였다.

이 가이사랴는 로마총독이 주재하는 도시였기 때문에 빌라도, 고넬료( 10:1), 로마군단의 백부장이 이곳에 살았었다. 바울은 로마로 호송되기 전 약 2년간 이곳에 감금되었었다( 21:8, 24:27)

이곳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같이 살면서 A.D 66년에 갈등이 심화되면서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충돌은 전국적인 대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후에는 기독교가 공식화 되기 이전인 A.D 3세기부터는 기독 신학자들의 연구 중심지가 되었으며 오리겐은 이곳에서 기독교를 가르쳤고, 유세비우스는 이곳에서 초기 기독교 역사를 저술하였다. 이후 640년에 아랍에게 점령당하고, 지금의 건물들은 십자군 시대인 1251-1252년 이곳에 루이 9세에 의하여 지어진 요새들이며 이후에는 버려진 상태로 있게 된다.

 

b, 욥바

요바의 뜻이 아름답다이며 해변길이 지나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언덕이 있어서 주변을 쉽게 조망할수 잇다. 이곳은 암초로 둘러싸여서 북쪽으로 입구가 잇는 아주 작은 항구였으며 가이사랴가 있기전에 항구로서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이 욥바는 산지에서 올수 잇는 항구였으며 또한 해변길과 아주 가까운곳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또한 욥바 주변에는 농작물 재배에 적합한 좋은 땅이 많이 있엇 경제적인 유리함이 많았던 도시이다.

이곳의 역사는 B.C 2000 sus 에는 이집트의 통치를 받았으며 알렉산더에게 항복한 욥바는 헬라화된 도시로 발전하였고 로마의 폼페이는 이곳을 자유도시로 만들었으며 줄리어스 시저는 욥바를 유대인에게 넘겨 주었으며 안토니아는 이 욥바를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넘겨 주었다. 헤롯은 이곳을 유다지방에 예속시켰다.

이곳은 성경에 단 지파에게 분배되었지만( 19:46) 통제를 못하다가 다윗시대에 이곳을 유다의 영토로 만들고, 솔로몬은 이곳을 통해 성전과 궁전을 짓기 위한 목재들을 이곳으로 들여왔다(대하 2:16) 또한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통해 다시스로 도망하는 배를 탄곳도 욥바이며( 1:3), 신약시대에는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려낸곳이다( 9:36-43). 또한 베드로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10)

 

c, 아벡 (신약의 안디바드리)

아벡은 강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가이사랴 남쪽 40 키로, 욥바에서 동북쪽으로 약 17키로 떨어진 곳으로 야르콘강의 수원지 근처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은 해변길이 좁아지는 길목에 잇는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곳이었다. 즉 이곳을 장악하면 무역로를 차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벡의 왕은 여호수아가 물리친 가나안 왕들중 하나였다( 12:18), 또한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참패를 당하고 법궤를 빼앗긴 곳도 아벡 근처이다(삼상 4), 헤롯은 이곳을 크게 도시로 재거하고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안디바드리라고 개명하였다. 또한 바울이 호송되었던 곳이기도 함( 23:31)

 

d, 야르콘강

야르콘강은 아벡 근처에서 발원하여 지중해로 흐르는 강으로 길이가 약 30키로 되며 샤론 평야에서 가장 큰 강이다. 이 강의 지류는 실로에서 흘러오는 와디 실로와 아얄론 골짜기에서 흘러오는 와디 아얄론이며 성경에서는 단과 에브라임지파 사이의 지역으로 나옮( 19:46)

 

e, 룻다

룻다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서쪽의 해안지역과 남쪽의 가자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으며 또한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길도 있어서 산지로 올라가는 관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며, 그 역사의 시작점은 정확하지 않다. 단지 투트모세 3세는 가나안을 점령하고 남긴 기념비에 오노와 욥바 사이에 위치하였다고 나오며, 성경에는 역대기에 베냐민 지파가 오노와 룻다와 그 향리를 세웠고라는 기록만 나온다(대상 8:12) 로마 시대에는 룻다에서 예루살렘으로 연결되는 세개의 주요도로가 있었는데 하나는 벧호론 길, 두번째는 엘 쿠베이바(el-Kubeibah) 세번째는 엠마오-기럇 여아림-모짜 를 경유하는 길로 이길은 오늘날의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잇는 주요도로이다. 특히 이 지리적 편리성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 길을 통제하기 위하여 룻다를 그들의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다.

룻다 주변은 비옥하여 과수원과 농작물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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