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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순례 장소 설명/이스르엘 골짜기

이스르엘 골짜기 - 벳샨(Beit shean)

by 제이 바이블 2012.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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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Beit shean

 

-       벳샨

히브리어로 벳샨은 스완의 집이란 뜻이 있다. 그럼 이 스완은 고대에 있었던 포도주의 신

 

-       지리적 위치

위치는 지중해와 요단계곡을 잇는 곳에 위치해 있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고, 크게 발전 할 수 있었던 도시이다. 이 이야기는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임을 알려주는 부분임.

 

-       고고학

1933년 펜실베니아 고고학 팀이 벳샨의 초기 정착 시기를 알고자 언덕을 발굴하였고 결과는 후기 신석기 시대( 6, - 5,000 BCE)  임을 밝혀냈어다. Rm 이후 초기 청동기 시대까지 사람들이 살았으며(3200-3000), 언덕의 북쪽에는 가나안 공동묘지가 발굴이 되어 2000-1600 BCE 것이 발견되었다.

 

역사

-       이집트 시대

벳샨은 주전 15세기 정도에 투트모세 3세에 의해서 정복되었는데 카르낙 신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벳샨은 그 당시 이곳을 다스리는 행정 중심지가 되었고 이곳에 많은 것을 남겼다. 이곳에 가나안 신전이 있었는데 거의 비슷한 시기로 보고 있고 그 안에 Mekal 이라는 신에게 봉헌되었다고 이집트 상형문자로 적혀 있음,

이 이집트가 다스리던 시기 (18-20왕조) 에 벳샨에 많은 인구가 있었는데, 이집트의 행정직원 아니면 군인들이었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19왕조 때에는 이 도시는 완전히 새롭게 지어졌으며, 펜실베니아 고고학 팀은 이곳에서 세티 1세의 비문과 람세스 2세의 기념비를 발굴하였다.

20왕조는 큰 행정 건물과, 지방 관료를 위해 작은 왕궁도 지었다. 20왕조 시기에는 “sea people 의 침입으로 인해 지중해쪽의 제어가 어려워졌다. 정확한 상황이 불분명하지만, 1150년 경에 이 벳샨은 파괴된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이집트는 다시 이곳을 장악하지 못한다.

 

-       철기 시대

1100년 경에 무너진 이집트 건물 위에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는데 이것은 블레셋에 의해 점령된 시기라고 볼 수 잇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곳을 이스라엘 침입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은 것 같아 보임. 성경에서의 기록인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 침임을 대비해 싸웠던 기록이 있다. 그 기록에 보면 사울은 죽어서 그의 몸은 벳샹 성벽에 달렸다고 하엿다.

다윗 도 이곳에 많은 군사적 원정을 와서 블레셋 사람들을 아쉬켈론, 가자, , 아쉬돋, 에크론에 쫓아낸다.

이후 이곳은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이스라엘 왕국에 속하게 된다(왕상 4:12)

앗수르는 732년에 디글랏 블레셋 3세에 의해서 이곳을 점령하고 이곳을 불지르게 된다. 이후 헬라 시대까지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게 된다.

 

-       헬라 로마시대

헬라시대 이곳은 스키토 폴리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다. 헬라시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지지 않았지만 주전 3세기 정도에 큰 신전이 텔에 지어지게 된다. 이 신전은 로마시대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고 헬라 신화에서 이곳은 포도주의 신 Dionysus 에 의해서 세워진 곳이며, 그의 보모 Nysa 가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을 Nysa-scythopolis 라고 알려지기도 하였다.

익곳은 헬라 시대에 프톨레미에 속한 도시로 나오고 198년 이곳에서 셀류커즈와 전쟁을 한 기록도 있다. 이후 하스모니안 시대에 이곳에서 대제사장 Jonathan Demetrius II Nicator 에게 죽임을 당한것으로 전해지며, 2세기 후반에 이곳은 다시 파괴된다.

 

63년 폼페이에 의해 유대를 로마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벳샨은 이후 데가볼리라고 하는 도시들 가운데 한곳으로 속하게 되어 번영을 누리게 된다. 그 시대에 이곳에 많은 로마 문화가 수입이 되고, 많은 이벤트가 있엇고, 특히 도시화 계획에 의해서 더욱 번성해 갔다. 로마 시대의 특이한 발굴품은 로마시대 무덤들을 발굴 하던중 석관을 발굴하였는데 그 석관에는 “Antiochus, the son of Phallion” 으로 적혀 있어서 아마도 헤롯대왕의 삼촌이었을 것으로 짐작함.

 

-       비잔틴 시대

비잔틴 시대에는 도시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 쌓였고 텔에 아치형의 지붕을 가진 교회가 지어진다.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다른 몇 개의 교회가 아래쪽에도 있었다고 적고 있어서 이곳은 크리스찬들이 주로 사는 도시가 되었음을 알 수 잇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도 이곳에 살았으며, 유대인들도 이곳에 같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방 신전은 부숴지지만, Nymphaeum (), 과 로마 목욕탕은 재건된다. 이후 지진으로 인해 이곳은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363, 409)

 

이후 아랍에 의해 634년 점령을 당하고 그 이후 이곳은 다시 재건이 되고 사람들이 살지만 749 1 18일의 큰 지진으로 인해 이곳은 완전히 파괴되게 되는데 이후 몇몇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있지만 더 이상의 도시로서의 발전은 없었다.

 

이후 영국 통치령때 이곳은 아랍과 유대인들의 잦은 마찰이 있었던 곳이엇으며, 1936-39, 1946년 이스라엘 독립 이후에 이곳에 키브츠 엔 Hanatziv 가 세워지게 된다.

 

 

 

n  시대적 상황

19왕조는 람세스 1, 세티 1, 이후 람세스 2세로 이어지는 1300년대부터 시작하는 왕조이다. 이 왕조에서 벳샨을 점령한 왕은 세티 1세로 그가 실질적인 19왕조 창시자라고 할 수 잇다.

세티는 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원정을 많이 하는 가운데 벳샨을 점령하게 된다. 이후 헷 족속의 영역까지 밀고 올라가지만 사실 이곳에서 전쟁을 치른 것은 람세스 2(1290-1224)였다. 람세슨 2세는 북쪽 가데스 지역에서 헷 족속과 10년 정도 전쟁을 치르면서 사실상 헷 족속에게 패하게 됨 그러면서 팔레스틴 지역에서 이집트 군대에 폭동이 일어나게 됨. 이 전쟁은 약 1275년경의 양측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마쳐지게 된다. 그리고 람세스 2세는 수도를 옮기면서 건설 사업에 집중하면서 이집트는 번영하게 된다. 이 람세스 2세 다음으로 오는 왕이 바로 (마르넵타(마르넵타 비문, 1224-1211) 로 그 비문에 처음 이스라엘이란 단어가 등장함. 그리고 그가 다스리던 시기가 격동의 시기로 이집트가 약해지는 시기 였음., 이때 바로 sea people 이 침입을 함. 이집트는 이들을 물리치기는 하지만 엄청난 고전을 하였음. 하지만 이후 이집트는 점점 쇠퇴하게 되었으며, 이집트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팔레스타인의 가나안 군소 국가들(도시 국가들)은 무질서해지고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올 수 잇는 상황들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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